창덕궁 후원 옥류천 지역의 소요암. 조선시대 인조(재위 1623~1649)가 이 곳 바위를 깎아 유상곡수연을 위한 둥근 홈을 만들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중국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307~365)는 계축년(癸丑年)인 353년 3월3일(이하 음력)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현 콰이지(會稽)산의 난정(蘭亭)에서 열린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한 뒤 사안(謝安)·지둔(支遁) 등 당시 모임을 함께 했던 명사 41인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희대의 걸작인 ‘난정서(蘭亭序)’라는 서문을 남겼다. 유상곡수는 삼월 삼짇날(음력 3월3일) 굽이도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던 놀이를 말한다.
내원상화계축갱재축 |
그로부터 24주갑(周甲·1440년) 뒤인 1793년 3월20일(계축) 조선 제 22대왕 정조(재위 1776~1800)는 왕희지의 ‘난정수계(난정의 모임)’의 고사(故事)를 본 떠 규장각 전·현직 관원과 그 자제 및 일찍이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 등 41명을 특별히 불러들여 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지역의 소요암(逍遙巖)의 곡수구(曲水溝)에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정조와 신하들이 직접 쓴 친필 시문 42수는 ‘내원상화계축갱재축’이란 이름으로 묶여졌다.
1792년과 1793년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창덕궁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며 화답한 시를 두루마리로 엮은 ‘내원상화갱재축’ 2점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궁중회화실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고 있다. 상설전시실 유물교체에 따라 지난 9일부터 전시되고 있는 ‘내원상화임자갱재축’과 ‘내원상화계축갱재축’이 바로 그것.
내원상화임자갱재축 |
이중 특히 계축년인 1793년 3월20일 열린 모임에서 정조와 신하들이 화답한 친필 시문 42수를 묶은 ‘내원상화계축갱재축’은 왕희지의 난정고사를 본 떠 진행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높이 33㎝, 길이 2490㎝에 달하는 ‘내원상화계축갱재축’은 정조의 친필 시를 필두로 당시 규장각 제학이던 정민시(鄭民始)와 서정수(徐鼎修), 원임 직제 서용보(徐龍輔), 윤행임(尹行恁) 등 당대 규장각 관원 및 주요 인사들의 친필을 한꺼번에 살필 수 있는 서예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다.
‘내원상화계축갱재축’의 맨 앞머리에서 정조는 친필로 날짜(연월)와 사람의 숫자가 ‘난정수계’의 고사에 부합하도록 모임을 열고 참석자들에게 각자의 장기대로 글을 짓게 했다고 설명한 뒤 스스로 ‘난정수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쓴 계시 6구절을 모아 엮은 시 2편을 지었다. 흥미로운 것은 모임 참석자들이 왕실에서 나눠 준 붉은색과 푸른색 등 다양한 색지(色紙)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색지는 금가루와 운모가루 등으로 장식돼 있어 조선후기 왕실에서 사용한 최상급 종이의 모습도 살필 수 있다.
1792년(임자·壬子) 3월21일 창덕궁 후원 농산정(籠山亭)과 수택제(水澤齋·현 부용정)에서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꽃구경과 낚시를 즐기면서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은 높이 36.5㎝, 길이 813㎝에 달한다. 원래 정조는 1788년(정조 12)부터 규장각 관원과 함께 봄마다 창덕궁 후원에서 꽃구경과 낚시를 하는 특별한 모임인 내원상조회(內苑賞釣會)를 정례화했으며, 1792년 모임부터 규장각 관원의 자제들까지 참석토록 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이에 따라 ‘내원상화임자갱재축’에는 규장각 제학 오재순(吳載純)과 그 아들을 비롯한 27인의 신하와 자제가 참여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고광의 연구위원은 “서예사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난정수계’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놀이 문화의 텍스트였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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