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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채점, 악기 조율 챙기던 ‘천의 얼굴’ 정조

윤탱여팬 2009. 11. 27. 17:16

손수 채점, 악기 조율 챙기던 ‘천의 얼굴’ 정조 [중앙일보]

‘정조학’주제로 오늘 수원서 첫 국제학술대회

융복(戎服·군복)을 입은 정조의 어진. 2004년 이길범 화백이 그렸다.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정조의 사당 ‘화령전’에 봉안돼 있다. [중앙포토]
‘천(千)의 얼굴의 제왕’, 조선의 22대 군주 정조(1752~1800)다. 올 초 정조 ‘비밀어찰(御札)’의 발굴로 그의 감춰진 얼굴이 드러나자 놀란 이도 많지만, 정작 우리는 그의 드러난 얼굴조차 다 알지 못한다. 방대한 저술만 봐도 그렇다. 48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정조는 개인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180권을 펴냈다. 재임기간 중 직접 편찬한 『어정서(御定書)』 89종 2490권, 신료를 시켜 만든 『명찬서(命撰書)』 64종 1501권 등도 나왔다. 정조 연구가 하나의 ‘학(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료다.

‘정조학’을 주제로 한 첫 학술회의가 마련됐다. 수원시에 있는 경기도문화의전당 컨벤션센터에서 28일 오전 11시부터 열리는 ‘제1회 정조학 국제학술대회’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소장 이완범)와 수원화성운영재단(대표 김영기) 공동주최다. 정조의 학문과 사상, 국정운영을 조명한 10개 논문이 발표된다. 우리가 잘 몰랐던 정조의 또 다른 모습을 소개한다.

◆‘교육자’ 정조=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교육자적 면모를 강조한다. 정조는 국정 통수권자이자 학문의 스승인 ‘군사(君師)’를 자부했다. 군주이자 스승이 되는 것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한다는 의미다.

정조는 규장각에 최정예 관료 양성 코스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두고, 이들의 시험 출제부터 채점까지 직접 챙겼다. 많게는 1000명 넘게 몰리는 성균관 유생과 지방 유생 선발시험까지 직접 출제·채점했다. 정조는 국왕이 직접 친필로 성적을 매겨줘야 선비들의 사기가 높아진다며 의욕을 보였다.

물론 이런 교육정책의 한계도 분명하다. 김 교수는 “정조는 인재의 선발·양성에 이르는 일체의 과정을 직접 관리하는 인치(人治)에 중심을 뒀다”며 “하지만 정조 이후 왕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왕의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면 인치의 폐해 역시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음악가’ 정조=송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악풍반정(樂風反正)’을 소개한다. 문체반정(文體反正)에 비견되는 음악에서의 고전주의다. 유교적 이상사회에 대한 신념에 차 있던 정조는 음악도 옛 것이 이상적이라고 믿었다. 왕실 악기의 음률까지 직접 일일이 확인할 정도였다. 음률이 잘못됐다며 명나라 때 악기를 구해 율을 조정하게 했다.

송 교수는 “악학(樂學)에 대한 정조의 식견은 탁월했지만 당대 민간에서 전개되고 있던 자유분방한 음악적 흐름과 균형을 이루진 못했다”고 평가한다.

◆‘무인’ 정조=박천재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정조의 무예사상을 검토한다. 정조는 ‘신궁(神弓)’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무예가였다. 박 교수는 “18세기 후반은 모처럼 찾아온 평화시기였지만, 정조는 무예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고 설명한다. 동아시아 무술사에 큰 획을 그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고, 역대 무장들의 전기를 대거 간행했다. 『임경업 실기』 『해동명장전』 『이충무공전서』 『안용복전』 등이 정조 시대에 나왔다.

정조는 맹자를 인용해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君子有不戰, 戰必勝)”고 강조했다. “문(文)과 무(武)는 새의 두 날개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며 상무적 기상을 촉구하기도 했다.

배노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