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음모론 진실 ‘소현세자는 진짜 독살 당했나?’
[뉴스엔 김형우 기자]
소현세자는 진짜 독살을 당했을까?
화제를 몰고다니는 KBS 2TV 수목드라마 '추노'는 소현세자 독살이란 음모른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두 남자 주인공 이대길(장혁 분)과 송태하(오지호 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도 결국 소현세자(강성민 분)와 관련된 정치적 이유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렇다면 정사 속엔 존재하지 않는 소현세자의 독살은 과연 사실이었을까?
인조의 아들이자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간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조선시대 수많은 독살 음모론 가운데서도 가장 신빙성이 큰 것으로 파악된다. 정조의 독살설이 계속된 연구와 사료의 발견으로 그 사실성이 희박해지는 것과 달리 소현세자 독살은 학계에서도 '타당성이 큰' 음모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의 한 기사가 소현세자의 독살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증거로 지목된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인조 46권)
정사에서도 이처럼 표현될정도로 소현세자의 죽음은 처참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지 2개월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점도 독살설을 지탱해주는 한 이유다.
그렇다면 왜 이런 독살설이 강력히 제기되는 것일까. 특히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는 독살음모설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인조의 왕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광해군이 한때 폭군 이미지로 받아들여졌으나 최근엔 극적인 반전을 이뤄내며 '개혁군주' '천재 외교가' '친서민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광해군을 몰아내며 인조가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친청외교에 대한 반대'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와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인조의 힘이었다.
이런 인조는 병자호란 후 왕권 정당성에 큰 상처를 입는다. 청나라에 유린당한 조선은 인조의 명분과 정책이 잘못됐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광해군의 왕권을 빼앗음이 잘못됐음으로 직결됐고 끝내 인조의 왕권이 정당하지 못함을 보여주기도 하는 바다.
이런 가운데 소현세자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다.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과 청나라에 대한 항복 후에도 청나라에 앙심을 크게 가졌던 것과 달리 오히려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복수를 꿈꾸는 이상론의 아버지와 현실을 바라보던 아들은 이 때부터 사이가 금이 갔을 터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왕족은 물론 청나라의 주요 인맥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힘을 길렀고 원정길에도 동참하며 서양 선교사와도 교류했다.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소현세자의 행위는 유교적 이상론에 빠져있던 서인과 인조에게 '반역행위'로 보였을 터다. 더욱이 청과 가까운 소현세자가 8년만에 갑작스레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서인과 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전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야사는 소현세자와 인조의 갈등은 재미있는 일화로 소개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졌다는 것.
사실 여부를 떠나 인조가 소현세자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쉽게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인조의 미움, 즉 왕권에 대한 정치적 압박감과 청에 대한 사적인 분노감이 버무러지며 그 대상이 소현세자로 이상하게 향하게 된 것을 짐작할 수도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소현세자의 아내와 자식들도 의문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소현세자의 왕비 강빈은 인조를 독살하려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사약을 받았다. 제주도로 귀향간 세 아들 중 두 아들도 의문스럽게 병으로 죽어갔다. 어린 막내 만이 시운을 탔는지 효종의 즉위로 인해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현세자는 진짜 독살을 당했을까?
화제를 몰고다니는 KBS 2TV 수목드라마 '추노'는 소현세자 독살이란 음모른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두 남자 주인공 이대길(장혁 분)과 송태하(오지호 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도 결국 소현세자(강성민 분)와 관련된 정치적 이유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인조의 아들이자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간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조선시대 수많은 독살 음모론 가운데서도 가장 신빙성이 큰 것으로 파악된다. 정조의 독살설이 계속된 연구와 사료의 발견으로 그 사실성이 희박해지는 것과 달리 소현세자 독살은 학계에서도 '타당성이 큰' 음모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의 한 기사가 소현세자의 독살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증거로 지목된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인조 46권)
정사에서도 이처럼 표현될정도로 소현세자의 죽음은 처참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지 2개월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점도 독살설을 지탱해주는 한 이유다.
그렇다면 왜 이런 독살설이 강력히 제기되는 것일까. 특히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는 독살음모설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인조의 왕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광해군이 한때 폭군 이미지로 받아들여졌으나 최근엔 극적인 반전을 이뤄내며 '개혁군주' '천재 외교가' '친서민 지도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광해군을 몰아내며 인조가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친청외교에 대한 반대'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와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인조의 힘이었다.
이런 인조는 병자호란 후 왕권 정당성에 큰 상처를 입는다. 청나라에 유린당한 조선은 인조의 명분과 정책이 잘못됐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광해군의 왕권을 빼앗음이 잘못됐음으로 직결됐고 끝내 인조의 왕권이 정당하지 못함을 보여주기도 하는 바다.
이런 가운데 소현세자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다.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과 청나라에 대한 항복 후에도 청나라에 앙심을 크게 가졌던 것과 달리 오히려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복수를 꿈꾸는 이상론의 아버지와 현실을 바라보던 아들은 이 때부터 사이가 금이 갔을 터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왕족은 물론 청나라의 주요 인맥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힘을 길렀고 원정길에도 동참하며 서양 선교사와도 교류했다.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소현세자의 행위는 유교적 이상론에 빠져있던 서인과 인조에게 '반역행위'로 보였을 터다. 더욱이 청과 가까운 소현세자가 8년만에 갑작스레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서인과 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전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야사는 소현세자와 인조의 갈등은 재미있는 일화로 소개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졌다는 것.
사실 여부를 떠나 인조가 소현세자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쉽게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인조의 미움, 즉 왕권에 대한 정치적 압박감과 청에 대한 사적인 분노감이 버무러지며 그 대상이 소현세자로 이상하게 향하게 된 것을 짐작할 수도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소현세자의 아내와 자식들도 의문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소현세자의 왕비 강빈은 인조를 독살하려했다는 의심을 받으며 사약을 받았다. 제주도로 귀향간 세 아들 중 두 아들도 의문스럽게 병으로 죽어갔다. 어린 막내 만이 시운을 탔는지 효종의 즉위로 인해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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