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뉴스] 왜 지금도 이완용의 이름이 거론되나?
노컷뉴스 | 입력 2010.08.12 08:00 | 수정 2010.08.12 08:06
[CBS 권영철 선임기자]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시원히 짚어 준다. [편집자 주]
올해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오는 8월15일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지 65년이 되기도 하고 지난 10일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한일 강제병합이 "한국 사람들의 뜻에 반한 것이며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친일잔재가 청산돼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거나 거꾸로 일제 식민통치가 '근대화의 기틀'이 됐다는 황당한 내용의 국사교과서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Why뉴스]는 '왜 지금도 이완용의 이름이 거론되나?' 이렇게 준비했다.
▶ 을사오적의 그 이완용 말이냐?
= 그렇다. 이완용 을사오적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매국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이완용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이완용이 누구인지 물어 봤다.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의사였을 거 같기도 하고... / 정치인 같은 사람? / 그냥 무슨 교수님 같은데 / 마음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 /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었을 거 같아요."
경술국치 100년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지 65년 밖에 안됐지만 이완용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잊혀져 가고 있다.
▶ '이완용' 그러면 매국노의 대명사처럼 그렇게 알고 있는데 잊혀져 가고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 그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이완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함 사람으로서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강제 합병시킨 장본인으로 친일 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고 있다.
이완용은 미국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친미주의 개화파 관료가 되었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친러파로 변신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제국과 친일파 관료들에게 대항하는 관료들 중 한 명 이었다.
1904년 러일 전쟁 후 다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직전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제국의 무력을 업게 된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 조약을 적극 지지하고 체결케 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데 앞장서고 이토 히로부미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서서 정미칠적이 되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서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 건을 통과시킨 뒤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국권을 일본에 팔아넘김으로서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를 범하게 되었다.
▶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수백억 원의 돈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 그렇다. 이완용이 나쁜 점은 나라를 팔아먹는 대가로 개인적인 치부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완용은 사망 직전 지금의 재산으로 환산할 경우 600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당시 이완용의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200억 원에 이르는 100만원을 갖고 있었는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20억 원), 한일병합 조약 체결의 대가로 15만원(30억 원)을 챙겼다.
무상으로 빌린 국유지를 제3자에게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수법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이런 재산을 이용해 군산. 김제. 부안 등의 비옥한 논을 집중 매입해 일제 초기 이완용이 보유한 토지규모가 여의도의 두 배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이 토지를 1915년에서 1917년 사이 일본인 대지주에게 처분해 현금을 보유하면서 당시 경성에서 '현금왕'으로 불리며 사채놀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이완용의 후손으로 부터 환수한 토지는 공시지가로 7,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증손자 되는 이윤형은 1992년 '조상 땅 찾기' 소송으로 서울 서대문구 일대의 땅2,372m(712평 - 당시 시가 30억 원) 되찾은 뒤 팔고 나서 캐나다로 이민했다.
▶ 이완용의 후손들은 어떻게 됐느냐?
= 매국노의 종말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69세로 사망했다. 이완용의 장례는 일제로부터 일본 순사들의 호위 아래 진행된 그의 장례식 행렬은 호사스러웠고, 고종황제 장례식에 못지않게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에 묻혔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하여 1979년에 이완용 후손들이 이완용의 묘를 파묘하여 유골은 화장했다. 지금은 채석장으로 바뀌었고, 그의 묘는 사라졌다.
후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인 흥선대원군의 친구이기도 한 이호준에게 양자를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이완용은 두 아들을 두었지만 장남이 요절하는 바람에 차남인 항구의 아들 병길이 가문을 이었다. 해방 후 이병길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이승만의 견제로 반민특위가 무력화 되면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손자 이병주는 해방직전 사망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특별한 친일행위가 확인되지 않아 불기소 처분을 받긴 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다.
이완용은 무덤도 사라지고 후손도 뿔뿔이 흩어져 존재조차 사라진 것이다.
▶ 그렇지만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단죄를 받지는 않았지 않느냐?
= 이완용의 친일 반민족 행각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심했지만 제대로 단죄되지 못했다.
사실 다른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도 단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 친일인명사전 > 이 발간되면서 민간차원의 '친일파 청산 작업'이이뤄졌다.
1945년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60년 만에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민족문제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발간 작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완성됐다.
국가가 하지 못한 역사 청산의 과제를 민간이 먼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2005년 발족해 5년간 친일파 후손 77명이소유이던 여의도 면적의 77%에 해당하는 554만m(평방미터)를 환수했으나 그 후손들은 재산을 찾으려는 소송을 계속 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도 이명박정부 들어 위원회 활동을 연장하지 않음으로써 활동이 종료됐다.
이스라엘이나 프랑스 등이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와 우리의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단죄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다.
혹시 앵커께서는 중국 남송시대의 악비라는 장군을 기억하나?
금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던 악비를 당시 남송의 재상이던 진회가 모함해 투옥시키고 처형을 했다.
지금 항주에 가면 악왕묘가 있는데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는 아직도 악왕묘에 포박된 채로 꿇어 앉아서 전시되고 있다. 옛날 중국에는 이 상에 침을 뱉거나 차는 습관이 있었다.
악비는 영웅이 되고 진회는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면서 지금도 그의 이름 회(檜- 노송나무회)는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일제치하에서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부와 명예를 누린 것과는 차별되는 것이다.
일본총리가 몇 차례 사과 발언을 했고 일본 왕이 '통석의 념'이라는 애매한 사과성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일본이 침략행위와 식민통치에 대해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단죄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 아직도 일제 잔재는 곳곳에 남아 있는데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나?
=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술국치 100년, 광복 65년이 지난 지금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법적, 물리적인 단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는 "이제는 역사적 청산 밖에는 방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만열 교수는 역사적 청산의 방법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가 < 한일 강제병합의 원천 무효를 선언 >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일 강제병합의 원천무효는 일제가 한국에서 한 모든 식민통치 행위가불법이 되는 것이다.
이만열 교수는 "우선 일본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우리와 강제로 맺은 조약들이 무효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신 종군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등에 대해 우리가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빅딜'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경술국치 100년인 올해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통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지만 정부차원의 행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보훈처가 8월15일 제65주년 광복절을 맞아 북간도와 중국 관내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유찬희·유기문 부자를 비롯하여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에게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긴 하지만 경술국치와 관련된 행사는 없다.
'과거는 잊자'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과거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바로잡고 독도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시원히 짚어 준다. [편집자 주]
올해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오는 8월15일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지 65년이 되기도 하고 지난 10일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한일 강제병합이 "한국 사람들의 뜻에 반한 것이며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Why뉴스]는 '왜 지금도 이완용의 이름이 거론되나?' 이렇게 준비했다.
▶ 을사오적의 그 이완용 말이냐?
= 그렇다. 이완용 을사오적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매국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이완용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이완용이 누구인지 물어 봤다.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의사였을 거 같기도 하고... / 정치인 같은 사람? / 그냥 무슨 교수님 같은데 / 마음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 /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었을 거 같아요."
경술국치 100년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지 65년 밖에 안됐지만 이완용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잊혀져 가고 있다.
▶ '이완용' 그러면 매국노의 대명사처럼 그렇게 알고 있는데 잊혀져 가고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 그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이완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의 함 사람으로서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강제 합병시킨 장본인으로 친일 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고 있다.
이완용은 미국에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친미주의 개화파 관료가 되었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친러파로 변신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제국과 친일파 관료들에게 대항하는 관료들 중 한 명 이었다.
1904년 러일 전쟁 후 다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직전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제국의 무력을 업게 된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 조약을 적극 지지하고 체결케 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데 앞장서고 이토 히로부미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서서 정미칠적이 되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서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 건을 통과시킨 뒤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국권을 일본에 팔아넘김으로서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를 범하게 되었다.
▶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수백억 원의 돈을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 그렇다. 이완용이 나쁜 점은 나라를 팔아먹는 대가로 개인적인 치부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완용은 사망 직전 지금의 재산으로 환산할 경우 600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당시 이완용의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200억 원에 이르는 100만원을 갖고 있었는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20억 원), 한일병합 조약 체결의 대가로 15만원(30억 원)을 챙겼다.
무상으로 빌린 국유지를 제3자에게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수법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이런 재산을 이용해 군산. 김제. 부안 등의 비옥한 논을 집중 매입해 일제 초기 이완용이 보유한 토지규모가 여의도의 두 배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이 토지를 1915년에서 1917년 사이 일본인 대지주에게 처분해 현금을 보유하면서 당시 경성에서 '현금왕'으로 불리며 사채놀이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이완용의 후손으로 부터 환수한 토지는 공시지가로 7,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증손자 되는 이윤형은 1992년 '조상 땅 찾기' 소송으로 서울 서대문구 일대의 땅2,372m(712평 - 당시 시가 30억 원) 되찾은 뒤 팔고 나서 캐나다로 이민했다.
▶ 이완용의 후손들은 어떻게 됐느냐?
= 매국노의 종말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69세로 사망했다. 이완용의 장례는 일제로부터 일본 순사들의 호위 아래 진행된 그의 장례식 행렬은 호사스러웠고, 고종황제 장례식에 못지않게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에 묻혔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하여 1979년에 이완용 후손들이 이완용의 묘를 파묘하여 유골은 화장했다. 지금은 채석장으로 바뀌었고, 그의 묘는 사라졌다.
후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완용은 몰락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인 흥선대원군의 친구이기도 한 이호준에게 양자를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이완용은 두 아들을 두었지만 장남이 요절하는 바람에 차남인 항구의 아들 병길이 가문을 이었다. 해방 후 이병길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이승만의 견제로 반민특위가 무력화 되면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손자 이병주는 해방직전 사망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특별한 친일행위가 확인되지 않아 불기소 처분을 받긴 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다.
이완용은 무덤도 사라지고 후손도 뿔뿔이 흩어져 존재조차 사라진 것이다.
▶ 그렇지만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단죄를 받지는 않았지 않느냐?
= 이완용의 친일 반민족 행각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심했지만 제대로 단죄되지 못했다.
사실 다른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도 단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 친일인명사전 > 이 발간되면서 민간차원의 '친일파 청산 작업'이이뤄졌다.
1945년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60년 만에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민족문제연구소가 본격적으로 발간 작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완성됐다.
국가가 하지 못한 역사 청산의 과제를 민간이 먼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2005년 발족해 5년간 친일파 후손 77명이소유이던 여의도 면적의 77%에 해당하는 554만m(평방미터)를 환수했으나 그 후손들은 재산을 찾으려는 소송을 계속 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친일파 재산 환수 작업도 이명박정부 들어 위원회 활동을 연장하지 않음으로써 활동이 종료됐다.
이스라엘이나 프랑스 등이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와 우리의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단죄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다.
혹시 앵커께서는 중국 남송시대의 악비라는 장군을 기억하나?
금나라의 침공에 맞서 싸우던 악비를 당시 남송의 재상이던 진회가 모함해 투옥시키고 처형을 했다.
지금 항주에 가면 악왕묘가 있는데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는 아직도 악왕묘에 포박된 채로 꿇어 앉아서 전시되고 있다. 옛날 중국에는 이 상에 침을 뱉거나 차는 습관이 있었다.
악비는 영웅이 되고 진회는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면서 지금도 그의 이름 회(檜- 노송나무회)는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일제치하에서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부와 명예를 누린 것과는 차별되는 것이다.
일본총리가 몇 차례 사과 발언을 했고 일본 왕이 '통석의 념'이라는 애매한 사과성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일본이 침략행위와 식민통치에 대해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단죄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 아직도 일제 잔재는 곳곳에 남아 있는데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나?
=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술국치 100년, 광복 65년이 지난 지금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법적, 물리적인 단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는 "이제는 역사적 청산 밖에는 방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만열 교수는 역사적 청산의 방법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가 < 한일 강제병합의 원천 무효를 선언 >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일 강제병합의 원천무효는 일제가 한국에서 한 모든 식민통치 행위가불법이 되는 것이다.
이만열 교수는 "우선 일본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우리와 강제로 맺은 조약들이 무효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신 종군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등에 대해 우리가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빅딜'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경술국치 100년인 올해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통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지만 정부차원의 행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보훈처가 8월15일 제65주년 광복절을 맞아 북간도와 중국 관내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유찬희·유기문 부자를 비롯하여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에게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긴 하지만 경술국치와 관련된 행사는 없다.
'과거는 잊자'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과거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바로잡고 독도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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