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리 창
정 지 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시구풀이
♠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 사라져가는 자신의 입김 자국(차고 슬픈 것)을 언 날개를 힘없이 파닥거리는 새에 비유함.
♠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 시적 자아의 안타까운 모습
♠ 외로운 황홀한 심사 :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심정, 황홀하다 : 자식의 영혼과의 순간적인 교감에서 빚어지는 정신적 기쁨 암시.
♠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잃어버린 자식을 나뭇가지에 잠시 머물다 날아 가버린 산새에 비유하고 있다.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애상적, 감각적, 회화적, 서정적, 상징적
어조 : 감정을 절제한 차분한 어조
심상 :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표현
화자의 슬픔을 억제하여 차분한 어조로 나타냄.
대상의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표현.
서로 상반되는 정서를 동시에 결합한 역설적 표현.
구성
유리창에 어린 영상(1행-3행)
창 밖의 밤 풍경(4행-6행)
자식을 잃은 슬픔(7행-10행)
특징 : 슬픈 감정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
주제 : 죽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비애
감상포인트
▶ 내용 : 이 시는 겉으로 서늘하고 안으로 뜨거운 정지용 시의 특징과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愛而不傷)의 절제된 정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 유리창의 이중성 : 이승과 저승의 운명적 단절,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교감의 매개체, '죽은 아이'와 서정적 자아와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 표현상 특징
감정 대위법 : 이 시에서 감정을 표현한 구절은 '차고 슬픈 것'과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다. 슬픔과 외로운 감정이 차가운 감각과 황홀한 심사와 어우러져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대비되는 감각이나 심사를 슬픈 감정과 대위 시킴으로써 감정을 절제한 것이 감정 대위법이다.
선명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언어 사용
모순형용 기법 사용 : 외로운 황홀한 심사
감정의 절제로 시적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객관화시킴
▶ 죽은 아들 : '언 날개', '물 먹은 별', '산새'
▶ 유리, 별, 보석의 공통점 : 소중하고 고귀함
정지용(鄭芝溶, 1902.5.15 ∼ 1950.9.25)
1902년 충북 옥천(沃川) 출생.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 귀국 후 모교의 교사, 8·15광복 후 이화여자전문 교수와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편집국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북한공산군에 끌려간 후 사망. 이상(李箱)과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 등의 시인을 등단시킨 공로가 있다. 작품으로는 시 《향수(鄕愁)》 《압천(鴨川)》 《이른봄 아침》 《바다》 등이 있고, 시집 에는《정지용 시집》이 있다.
참고 1
'유리창'의 기능과 의미
유리창을 경계로 하여 바깥과 안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항 관계를 보면, 우선 밖에서 유리창에 와닿는 것은 차고 슬픈 것이며 안에서 유리창과 접촉되어 있는 것은 입김을 흐리우는 것입니다. 열없이 붙어서 있는데도 입김이 창을 흐리우게 되는 것은 그만큼 밖이 차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방안은 상대적으로 따뜻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시의 구성 자체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깥과 안의 차가움과 따사로움이 교체되어 있습니다. 즉,
1행 - 바깥 차가운 공기 = 바깥 바람(어른거리게 하는 것)
2행 - 안 따스한 공기 = 입김, 열기(창을 흐리게 하는 것)
3행 - 바깥 차가운 것 (언 날개)
4행 - 안 입김, 열기 (지우고 보고)
두 번째의 대립항은 창밖의 공간은 어둡고 그 안은 밝다는 것입니다.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라고 한 말에서 우리는 창 안이 밝다는 것을 동시에 암시받게 됩니다. 즉 방 안이 밝기 때문에 밤은 유리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밀려 나가는 것입니다. 한(寒)/난(暖)의 대응이 5행 이후에 오면 암(暗)/명(明)의 대비로 바뀌는 것이지요.
5행 - 바깥, 어둠
6행 - 바깥, 어둠 속의 빛 (별빛)
7행 - 안, 밝음 (유리를 닦는 것, 빛나게 하는 것)
8행 - 안, 밝음 속의 어둠 (외롭고 황홀한 심사)
그리고 마지막 두 행에 이르면 폐혈관이 찢어져 산새처럼 날아가 버린 (전기적 비평에서는 딸의 죽음) 죽음이 등장함으로써 바깥은 죽음, 안은 생으로서 이른 바 이승과 저승의 두 관계항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유리창은 결국 생사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죽음을 통해서 생이, 생을 통해서 죽음이 나타나게 되는 매개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창이 차갑기 때문에 입김이 서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차가움이 있기에 비로소 생명은 입김처럼 서릴 수 있지요. 생은 그 반대쪽의 죽음의 감촉에 의해서 비로소 빛과 그 열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2
서정적 자아와 주제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유리창에 붙어 서서 입김으로 유리를 닦으며 창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 창에 어른거리는 것은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새의 영상이다. 그 새는 폐혈관이 찢어진 채 죽은 어린아이의 혼인데, 이것은 정지용이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고서 썼다는 창작 배경과 관련된다. 따라서 이 시의 주제는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다.
참고 3
감정 절제의 표현 기법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란 처절하리만치 슬픈 법인데, 이 시에서는 그 감정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슬픔 감정의 노출이 과잉되지 않고 절제되어 드러나는 것은 감정의 대위법에 의해서다. '차고 슬픈 것', '외롭고 황홀한 심사'와 같이 차가운 것과 슬픈 것, 외로운 것과 황홀한 것을 대립시키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절제된 언어로 시를 형상화하는 능력은 정지용 특유의 것이다. 모더니즘의 이론적 기수인 김기림이 정지용을 극찬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선명하고 참신한 이미지의 도입, 감각적이고 세련된 시어의 선택 등이 이미지즘의 특징이다. (시각적 이미지와 대위법을 통한 감정의 절제)
참고 4
중심 시어의 암시성
♠ 유리창: 정지용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는 '창이다. 그에게 '창은 창 안과 창 밖을 단절시키면서 동시에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창 안에는 서정적 자아가 위치하고 창 밖은 주로 풍경으로 나타난다. 이 시에서 유리창은 죽은 자식과 화자 사이를 가로막은, 즉 삶과 죽음을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왜 유리창을 열지 않은가. 창을 열면 잃어버린 아이의 비유적 형상인 새의 영상마저 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리창은 서정적 자아를 그리워하는 대상과 격리시키면서 동시에 영상으로 대면하게 한다. 즉, 유리창이 풍경을 통과시키므로 영상을 볼 수 있고 시인은 이 영상을 아름답게 그려내며 스스로 황홀해 하는 것이다. 또 한편, 유리창은 바깥 풍경을 비추면서 동시에 그 풍경에 나타난 별, 곧 죽은 아이의 혼과의 교감을 가능케 한다. 요컨대 정지용의 '유리창'은 곧 창 안의 서정적 자아와 창 밖의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이자, 한편 차단기인 셈이다.
♠ 별, 새 : 별이나 새나 모두 죽은 아이의 영혼을 암시한다. 특히 별은 빛으로써 유리창을 통과하므로, 서정적 자아와 죽은 아이와의 영혼을 교감시킨다. 이 때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서정적 자아의 슬픔은 어둠 석에 보석처럼 빛나는 '물먹은 별'에 집약된다. 그러므로 '물먹은'이라는 시어는 한편 서정적 자아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의 반짝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 이 시의 중심이 되는 심상은 '유리창'이다. 유리창은 투명하기 때문에 창 밖을 내다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창 밖을 차단하기도 한다. (창 밖과 창 안을 단절시키면서 동시에 이어주는 역할) 즉 시적 자아는 바로 이 유리창 때문에 죽은 아들의 영혼과 교감이 가능하다. 반대로 유리창 때문에 아들의 영혼에게 다가설 수 없다. 시적 자아는 단지 유리창에 붙어 서서 밤하늘에 빛나는'별'(아들의 영혼)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유리창에 붙어 서면 입김 때문에 흐려서 별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유리창에 어리는 입김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죽은 아들과의 영적 교감을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