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항사 (박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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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항사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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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51세 때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경기도 용진에 돌아가 생활하던 중, 한음 이덕형이 그에게 두메 살림의 어려운 형평을 묻자 이에 대한 답으로 지은 작품이다. 내용은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난을 원망하지 않고 도(道)를 즐기는 장부의 뜻은 변함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궁핍한 생활을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가사의 역사적 흐름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일상 생활의 언어를 대폭 등장시켜 생동감과 구체성을 배가한 점이 돋보인다. 이 작품이 유자(儒者)로서의 당위와 궁핍한 현실 사이에서 오는 갈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조선 후기 가사의 특성 중 하나로서, 그 때문에 이 작품을 조선 전기 가사와 후기 가사의 과도기적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
[본문] |
■ 서사 - 길흉 화복을 하늘에 맡기고 안빈 일념으로 살려는 심정 |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은 나보다 더한 이가 없다. 길흉 화복(운명)을 하늘에 맡겨 두고, 누추한 깊은 곳에 초가집을 지어 두고, 아침 저녁 비바람에 썩은 짚이 섶이 되어, 세 홉 밥, 닷 홉 죽에 연기도 많기도 많구나.설데운 숭늉에 빈 배 속일 뿐이로다. 생활이 이러하다고 장부가 품은 뜻을 바꿀 것인가. 가난 하지만 편안하여, 근심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을 적을망정 품고 있어, 옳은 일을 좇아 살려 하니 날이 갈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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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1 - 충성심으로 백전 고투했던 왜란의 회상 |
가을이 부족하거든 봄이라고 넉넉하며, 주머니가 비었거든 술병이라고 술이 담겨 있겠느냐. 가난한 인생이 이 세상에 나 뿐이랴. 굶주리고 헐벗음이 절실하다고 한가닥 굳은 마음을 잊을 것인가. 의에 분발하여 제 몸을 잊고 죽어야 그만 두리라 생각한다. 전대와 망태에 줌줌이(한줌 한줌) 모아 넣고, 임진왜란 5년 동안에 죽고야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는 혈전을 몇 백전이나 지내었는가.
■본사 2 - 전란 후 돌아와 몸소 농사를 지음 일신이 겨를이 있어서 일가를 돌보겠는가? 늙은 종은 종과 주인간의 분수를 잊었거든, 하물며 나에게 봄이 왔다고 일러 주기를 어느 사이에 생각할 것인가? 밭갈기를 종에게 묻고자 한들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몸소 농사를 짓는 것이 나의 분수인 줄을 알겠도다. 세신초(細莘草:잡초)가 많이 난 들에서 밭을 가는 늙은이와 밭두둑 위에서 밭 가는 늙은이를 천하다고 할 사람이 없건마는아무리 갈고자 한들 어느 소로 갈 것인가? ■본사 3 - 농사를 지으려 하니 농우가 없어, 농우를 빌리러 감 가뭄이 이미 심하여 시절이 다 늦은 때에, 서쪽 두둑이 높은 논에 잠깐 지나가는 비에, 길 위에 흘러내리는 근원없는 물을 반만큼 대어 두고, 소 한 번 빌려 주겠다 하는 탐탁하지 않게 하는 말씀을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도 없는 황혼에 허둥지둥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 밖에 멀찍이 혼자 서서 큰 기침 에헴 소리를 꽤 오래도록 한 뒤에 "아, 그가 누구이신가?" 하고 묻는 말에 "염치없는 저올시다" 하고 대답하니,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그대 어찌하여 와 계신가?" 하기에 "해마다 이러하기가 염치없는 줄 알건마는 소 없는 가난한 집에 걱정이 많아 왔삽노라." ■본사 4 - 농우를 빌리러 갔다가 수모를 당하고 돌아옴 "공짜로나 값을 치르거나 해서 줄 만도 하다마는,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저 사람이 목 붉은 수퀑을 구슬같은 기름이 끓어 오르게 구워내고, 갓 익은 삼해주를 취하도록 권하였거든, 이러한 고마움을 어찌 아니 갚겠는가? 내일 소를 빌려 주마 하고 큰 언약을 하였거든, 약속을 어김이 미안하니 말씀하기 어렵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설마 어찌할까? 헌 갓을 숙여 쓰고, 축이 없는 짚신에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작은 모습에 개가 짖을 뿐이로다. ■본사 5 - 집에 돌아와 야박한 세태를 한탄하며 춘경을 포기함 작고 누추한 집에 들어간들 잠이 와서 누워 있으랴? 북쪽 창문에 기대어 앉아 새벽을 기다리니, 무정한 오디새는 이내 원한을 재촉한다. 아침이 마칠 때까지 슬퍼하며 먼 들을 바라보니 즐기는 농부들의 노래도 흥이 없이 들린다. 세상 인정을 모르는 한숨은 그칠 줄을 모른다.아까운 저 쟁기는 볏의 빔도 좋구나! 가시가 엉긴 묵은 밭도 쉽게 갈련마는, 텅 빈 집 벽 가운데 쓸데 없이 걸렸구나! 봄갈이도 거의 지났다. 팽개쳐 던져 두자. ■결사 1 - 자연을 벗삼으면서 절로 늙기를 소망함 자연을 벗삼아 살겠다는 한 꿈을 꾼 지도 오래더니, 먹고 마시는 것이 거리낌이 되어, 아아! 슬프게도 잊었다. 저 기수의 물가를 보건대 푸른 대나무도 많기도 많구나! 교양있는 선비들아, 낚싯대 하나 빌려 다오. 갈대꽃 깊은 곳에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벗이 되어, 임자 없는 자연 속 풍월강산에 절로절로 늙으리라. 무심한 갈매기야 나더러 오라고 하며 말라고 하겠느냐? 다툴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이것뿐인가 여기노라.
■결사 2 - 빈이 무원하고 단사 표음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충효와 화형제·신붕우에 힘씀 (이제는 소 빌리기를 맹세코 다시 말자) 보잘것 없는 이 몸이 무슨 소원이 있으리요마는 두세 이랑 되는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 두고,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겠노라. 나의 빈천함을 싫게 여겨 손을 헤친다고 물러가며,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겨 손을 친다고 나아오랴? 인간 세상의 어느 일이 운명 밖에 생겼겠느냐? 가난하여도 원망하지 않음을 어렵다고 하건마는 내 생활이 이러하되 서러운 뜻은 없다. 한 도시락의 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는 어려운 생활도 만족하게 여긴다. 평생의 한 뜻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없다. 태평스런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일로 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벗끼리 신의 있게 사귀는 일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 밖에 나머지 일이야 태어난 대로 살아가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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