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그 시대의 현실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특히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라 해도 좋을 2009년 상반기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10 아시아>는 2009년 상반기 드라마 결산을 통해 한국 드라마가 반영하는 어떤 현실에 대해 조명했다. 왜 상반기 드라마들은 그토록 ‘막장 드라마’가 많았고, 재벌 2세나 정치인이 없으면 이야기의 전개가 불가능해졌던 것인가. 내용도, 완성도도 제각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한 시대의 흐름을 드러내고 있는 2009년 상반기 드라마에 대한 <10 아시아>의 조명. 또한 시대적 분위기에 맞게 드라마와 그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언론을 결합시킨 또 다른 상반기 결산이 준비돼 있다.
왕은 죽었다. 선거에서는 부패로 얼룩진 자가 당선이 유력하다. 대기업 회장들은 범죄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 드라마 얘기다. 대기업 오너가 살인교사, 폭행, 협박을 일삼는 MBC <에덴의 동쪽>부터 권력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MBC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까지, 2009년 상반기 드라마 속 세상의 상당수는 탐욕스런 권력자들이 지배하는 지옥도였다. 이 모든 것이 제작자들의 의도라고는 할 수 없다. 마지막회에서 투표의 중요성을 외치는 KBS <남자이야기>를 제외하면,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하려는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 경우는 찾기 힘들다.
권력자와 그들을 쫓는 혹은 복수하는 이들의 난장
그러나 올 상반기 드라마는 <선덕여왕>이나 SBS <자명고>처럼 권력자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물론, MBC <내조의 여왕>처럼 한 달 치 집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천지애(김남주) 같은 소시민도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어느 실세에 줄서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 권력은, 혹은 권력자들은 그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권력 세계의 승리자들은 대부분 ‘막장’이 되더라도 끝까지 권력을 원한 자들의 것이었다. <에덴의 동쪽>의 이동철(송승헌)은 조폭이 되고, 범법을 저질러서라도 신태환(조민기)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건 SBS <아내의 유혹>에서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민소희로 변신해 복수를 다짐하는 구은재(장서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원수가 자신에게 저지른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고, 그들의 권력을 빼앗아 온다. 반면 <카인과 아벨>의 이초인(소지섭)이나 <남자이야기>의 김신(박용하)은 권력을 쥔 적에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선한 의지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하려 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선택은 전자였다.
작품의 성패가 이야기의 구조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KBS <꽃보다 남자>에서 신화그룹 강희수(이혜영) 회장은 아들과 ‘서민’의 사랑을 막기 위해 납치와 협박을 자행한다. 청춘남녀의 비현실적인 로맨스에도 권력자의 힘은 절대적이다. 또한 <꽃보다 남자>는 이 ‘막장 짓’을 ‘신화그룹의 70만 가족’을 위한 결단으로 포장하는 반면, 금잔디(구혜선)의 어머니는 신화그룹에 의해 모든 걸 잃은 상황에서도 금잔디가 신화그룹의 안주인이 될 것이라고 떠든다. 물론 <꽃보다 남자>의 팬들도 이런 설정에는 비판을 제기했다. 하지만 상반기 시청자들의 관심이 선악의 문제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빚어내는 극단적인 대립에 쏠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작년에는 부패한 권력자들을 물리쳤던 SBS <일지매>가 높은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MBC <돌아온 일지매>는 한자릿수 시청률에 머물렀다. 권력자이면서도 권력에 초연한 듯한 KBS <천추태후>의 천추태후(채시라)는 과거의 영웅사극 같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막장 드라마’에 ‘착한 드라마’가 밀린 것이 아니다.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드라마에서 권력에 초연한 캐릭터의 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상반기 드라마의 대세였던 ‘여자 대 여자’의 구도가 가리키는 것을 보라. <돌아온 일지매>, <카인과 아벨>, <남자이야기>등의 남자들과 달리, KBS <미워도 다시 한 번>, <아내의 유혹>, <자명고>의 여자들은 권력에 대한 욕망과 복수심, 연민 사이에서 고민한다.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아내의 유혹>의 핵심은 한 남자에 대한 두 여자의 사랑이 아니라, 한 남자를 매개로 모든 것들을 걸고 싸우는 두 여자의 권모술수에 있었다. 반면 주인공들이 권력의 무게에 짓눌리는 어두운 부분을 부각한 <자명고>는 대중적인 반응에서 멀어져 있다. 이런 모든 경향들과 대중의 반응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이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SBS <시티홀>이 차승원-김선아의 캐스팅과 무리 없는 전개에도 10% 중반의 시청률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은 요즘 드라마의 어떤 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복고’라는 허울뿐인 퇴행 속의 조용한 개혁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TV 브라운관을 채우는 사이, 드라마는 복고로 회귀한다.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오혜성은 지옥 훈련을 통해 정상의 야구 선수로 거듭난다. 이는 1980년대 한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에서 탄생한 그 시대의 성공논리였다. 그리고 2009년에는 <2009 외인구단>의 오혜성은 물론 구은재와 이동철도 ‘지옥훈련’ 같은 시련을 거친 뒤 적과 맞붙는다. 비현실적인 주인공의 성장 속에서 인성은 망가지고, 캐릭터는 오직 사랑이나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단편적인 인물이 된다. 경제성장은 더 이상 20년 전처럼 빠르지 않은데, 사람들은 그 때처럼 빠른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가지며 벌어지는 코미디. ‘막장 드라마’에 대한 우려는 단지 이야기의 자극성뿐만 아니라, 2009년에 통용될 수 없는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덴의 동쪽>과 <아내의 유혹>이 모두 대립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다가 결국 황당한 엔딩으로 마무리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캐릭터의 전체적인 삶을 바라보지 못한 채 권력자와 주인공의 혈전만을 반복하는 구성은 결국 무리한 파국으로 끝난다. 그렇게 2009년 상반기 드라마는 퇴행을 거듭했다.
그나마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꽃보다 남자> 이후 가장 큰 성공작이 <내조의 여왕>이었다는 사실이다. <10 아시아>가 독자들을 상대로 한 드라마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한 <내조의 여왕>은 권력을 외면하기엔 사는 게 급하고, 권력에 충성하자니 양심이 걸리는 소시민의 이야기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돈과 성공을 원하면서도 어디까지 가야할 것인지 고민하는 천지애(김남주)와 온달수(오지호)의 모습은 지금 한국 드라마는 물론, 대중의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내조의 여왕>은 지금 금잔디처럼 될 수 없는 서민들의 딜레마를 대중적인 코드 안에서 풀어냈다. 또한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한 MBC <신데렐라맨>을 비롯해 KBS <그저 바라보다가>, <시티홀> 등 동시간대에 등장한 세 드라마는 한결같이 착한 주인공들을 내세웠다. 그러나 세 작품은 완성도와 별개로 그 선한 의지를 시청자들에게 설득하지는 못했다. 메시지에는 동의하나 메시지를 위해 결국 감정에 호소해야 했던 <남자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대중들이 아직 이런 정서에 공감하기 힘든 상태임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MBC <잘했군 잘했어>처럼 가족 드라마의 틀 안에서 극단적인 스토리를 일관하는 작품과 반대로, KBS <솔약국집 아들들>은 음악마저 최대한 자제하는 담담한 시선으로 가족 사이의 정을 이야기한다.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던 SBS <가문의 영광>은 자극적인 설정으로 시작하되 그것을 가부장제 하의 가족애로 봉합하면서 ‘막장 드라마’와는 또다른 길을 보여줬다. <내조의 여왕>과 <솔약국집 아들들>같은 작품들이 혁명적인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의 흐름은 바꿀 수 있는 조용한 개혁의 시작은 될 것이다.
권력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우하고, 사람들은 권력자를 욕하면서도 어느새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며 권력에 다가선다. 하지만 그것의 끝에 피로와 파국만이 남는 것을 알게 될 때,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선한 세상을 위한 노력이다. 최근 방영 초반부터 시청률 20%를 넘긴 <선덕여왕>은 미실의 폭정에 덕만이 ‘사람들’을 데려와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다. 과연 시청자들은 덕만이 나온 뒤에도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권력을 놓고 벌이는 대립의 피로함을 넘어, 퇴행했던 상반기 드라마의 문제들을 넘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 이 모든 건 드라마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