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안중근 재판관할권 변경 위해 밀사 파견
이태진 교수 일본 기밀문서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일본 정부는 안중근 의거의 배후 세력에 고종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이 항일 독립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밀문서가 발견됐다.
안중근ㆍ하얼빈학회 공동대표인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자료에서 안중근 의거 이듬해인 1910년 1-3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와 조선통감이 고무라 일본 외무대신에게 각각 보낸 보고서 6건을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
이 기밀보고서는 경성에서 하얼빈을 거쳐 1910년 1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고종의 밀사 2명이 안중근을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관할권을 옮겨 구해내려 했던 정황을 담고 있다.
3월2일자 보고서는 특히 "배일(排日)의 본원(本元)은 물론 한국황제라고 한다. (중략) 작년 10월 하얼빈에서 일어난 흉변(凶變) 사건(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도 궁정에서 연추(煙秋.크라스키노)의 최재형을 선동한 것"이라며 고종을 하얼빈 의거의 배후로 지목했다.
같은 날 보고서에는 또 "니코리스크 시에서 사망한 이용익도 한황(韓皇)의 밀사로서 당시 그가 가지고온 내탕(內帑.왕의 사비)의 잔금 7천엔은 지금도 최봉준의 집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고 기록됐다.
앞서 2월17일자 보고서에는 고종의 밀사가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에 출석해 "아태황제(我太皇帝.고종) 폐하의 칙명을 받고 이렇게 폐하의 친새(親璽)가 찍힌 밀서를 가지고 여순(旅順)의 옥중에 있는 안중근을 구해내 러시아령에 있는 우리 동포와 함께 극력 이를 러시아의 재판에 맡기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 밀사들은 30대의 송선춘, 조병한으로 송선춘은 한국 관리 출신으로 일본어와 영어에 능숙하고 일본과 미국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소네 조선통감이 1910년 1월8일에 고무라 외무대신에게 보낸 비밀통발(機密統發) 제20호라는 보고서에는 안중근 의사를 구하기 위해 러시아인 미하일로프가 상하이의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에게 변호를 의뢰했으며 변호비용은 고종의 심복으로 상하이에 있던 민영익, 민영철, 현상건이 모금한 1만엔으로 냈다고 적혀있다.
더글러스는 안중근을 면회해 '한국정부의 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암살한 전명운이 겨우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므로 안중근도 비슷한 형량을 받을 것이고 만약 재판이 무법(無法)으로 가면 열국(列國)에 호소해 만국공동재판을 받도록 하겠다'라 말했다고 기록됐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보낸 밀사는 안중근이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고 한인들에게 안중근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파견됐으며 이 2명 외에도 더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일본이 퍼뜨린 고종 무능론의 영향으로 그간 학계에서도 항일독립운동은 고종 황제와 무관하다고만 생각돼왔지만 실제로 직접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