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제시하고 있는 선덕여왕 말년의 후계구도는 춘추 대 비담의 대결이다. 김춘추의 부모를 죽인 미실의 '패거리'들 즉 비담 캠프의 구성원들이 춘추의 등극을 두려워하여 비담 주변으로 모여듦에 따라 이러한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드라마 속의 선덕여왕은 한편으로는 조카인 춘추에게 대권을 넘겨주려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연인' 비담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선덕여왕>의 최근 방영분에서는 조카와 연인의 투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여왕의 고뇌를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드라마 속의 후계구도는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면 좀 심할 테고, '새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면 듣기도 좋고 그럭저럭 괜찮은 표현이 아닐까 한다.
대한민국에서 '선덕여왕 다음은 진덕여왕이고 진덕여왕 다음이 김춘추'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시청자들이건 드라마 작가들이건 다 마찬가지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따금씩 '김춘추가 선덕여왕 다음에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혹시 선덕여왕 때부터 이미 후계자로 부각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김춘추의 부모가 미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처음 듣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미실의 패거리들이 김춘추의 등극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또 김춘추의 등극을 두려워하는 부류들이 있어서 그들이 비담을 중심으로 결집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 말년의 후계구도는 어떠했고, 김춘추가 왕재(王才)로 부각된 시점은 언제였을까? 과연 김춘추는 이모인 선덕여왕 밑에서 후계자의 물망에 올랐을까?
선덕여왕 말년의 후계구도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두 아들인 동륜태자(장남)와 제25대 진지왕(차남)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제26대 국왕이 진지왕의 자손들 사이에서 나왔다면, 신라에서 성골남진(聖骨男盡)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진지왕-김용수·김용춘-김춘추 혈통에서는 남자들이 계속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동륜태자(편의상 '제1세대') 쪽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성골남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동륜태자의 아들들인 진평왕·진정갈문왕·진안갈문왕(제2세대)에게서 아들이 전혀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갈문왕이란 국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작위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제2세대에 뒤이어, 제3세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동륜태자 라인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김용춘 혹은 김용수와 결혼함으로써 진지왕 라인으로 넘어가 김춘추를 낳은 천명공주, 무왕과 결혼함으로써 백제 쪽으로 넘어가 의자왕을 낳은 선화공주(이설 있음)를 제외하고, 정작 진평왕을 계승한 선덕여왕에게서는 아예 자식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선덕여왕이 자식을 낳지 못한 의학적 원인은 아무래도 여왕 본인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작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에 따르면, 진평왕이 외손을 보기 위해 용수·용춘을 덕만공주의 침소에 번갈아 '투입'해 보았지만 매번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등극한 후에 용춘·을제·흠반이 여왕의 남편이 되었지만 이때도 자식이 전혀 생기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왕에게 불임의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여왕의 후계자로 떠오른 인물은 누구였을까? '진지왕이 폐위된 뒤로 그 자손들의 지위가 격하되기는 했지만, 선덕여왕의 근친 중에서 유일한 남자는 김춘추였으므로 김춘추가 후계자로 부각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사고의 표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에서 '원칙상 남자가 왕이 되어야 하지만, 급할 때에는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한 점을 볼 때에, 동륜태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남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성별보다는 신분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간에 혈통적으로 동륜태자와 가까운 사람이 후계자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에, 선덕여왕의 후계자로 부각된 사람은 동륜태자의 손녀이자 여왕의 사촌인 동시에 진안갈문왕의 딸인 승만공주(훗날의 진덕여왕)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어떻게든 선덕여왕의 몸에서 다음 국왕을 생산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어졌겠지만, 여왕이 심각한 건강문제를 겪은 여왕 5년(636) 이후로는 승만공주가 조심스럽게 차기의 대안으로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선덕여왕 말년에 승만공주를 중심으로 후계구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여왕 사후에 승만공주가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른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덕만공주는 진평왕 사후에 국회의 의결(귀족들의 옹립)이라는 절차를 밟아 왕위에 오른 데에 비해 승만공주는 그런 절차 없이 곧바로 왕위에 오른 점을 볼 때에, 진평왕 말년의 덕만공주보다는 선덕여왕 말년의 승만공주가 보다 더 안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담의 난 같은 메가톤급 정변을 겪고도 또 정변 진압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는데도 승만공주가 자연스레 왕위를 계승한 사실은,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이미 그를 중심으로 후계구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김춘추가 후계자의 물망에 오를 여지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진덕여왕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김춘추도 그처럼 자연스럽게 진덕여왕의 자리를 계승했을까? 선덕여왕 말년에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떠오른 것처럼 김춘추도 진덕여왕 말년에 후계자로 부각되었을까? 이어지는 항목에서 그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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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왕릉의 모습. |
ⓒ 김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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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가 후계자로 떠오른 시점
진덕여왕 치하에서 김춘추의 지위가 어땠을 것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가 이미 정통성에서 이탈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강제로 폐위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왕-김용수·김용춘-김춘추 라인에서는 원칙상 왕이 나올 수 없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평왕이 한때 김용수를 천명공주와 결혼시킨 다음에 그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가 아니라 '진평왕의 사위 김용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훗날 김춘추의 혈통에서 신라 왕위가 계승된 사실 때문에 '김춘추가 이미 오래 전부터 왕재로 거론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순전히 결과론적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골을 최상위에 두는 신분제 사회에서 성골 신분을 상실한 진지왕의 후손들은 일찌감치 왕위계승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은 선덕여왕 사후에 김용춘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덕여왕이 죽은 시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 16년(647) 음력 1월이고, 김용춘이 죽은 시점은 <화랑세기>에 의하면 동년 음력 8월이다. 김용춘이 선덕여왕보다 늦게 죽었는데도 그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것은, 진지왕 폐위와 동시에 그 후손들이 왕위계승권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춘추가 외교 방면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또 김유신과 더불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분제 사회에서는 능력보다 신분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그런 후천적 능력만으로는 왕재로 거론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왕보다 더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결국에는 재상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게 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의 한계가 아닌가. 왕보다 더 유능한 사람으로서 왕의 밑에서 살 수 없는 사람은 왕에게 버림을 받든가 아니면 왕을 내쫓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것이 바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의 한계였다.
그래서 김춘추는 선덕여왕 시대는 물론이고 진덕여왕 시대에도 후계자로 거론될 수 없었다. 진덕여왕 사후에 성골남자는 물론이고 성골여자도 모두 사라진 상황 하에서 귀족들이 알천을 섭정으로 옹립한 사실은, 김춘추의 공식적 지위가 알천보다도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알천의 추천을 받은 김춘추가 귀족들의 추대를 세 차례나 사양한 것은, 세 번 정도 사양하는 제스처를 취해야 할 만큼 김춘추에게는 왕위가 과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김춘추는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국왕 후보로 부각되었을까? <삼국사기> 권5 '태종무열왕 본기'에 따르면, 김춘추가 차기 국왕으로 부각된 시점은 알천이 섭정을 거부하고 김춘추를 추천한 때였다. 그러니까 진덕여왕이 사망한 진덕여왕 8년(654) 음력 3월로부터 음력 4월 사이의 어느 시점부터 김춘추의 위상이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이는 김춘추가 후계자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기간이 길어야 1개월밖에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위계승권이 없는 그가 그렇게 급부상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성골이 완전히 끊어져서 새로운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다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알천마저 섭정 자리를 사양했다는 점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춘추가 18세 풍월주 재임 경력을 통해 이미 리더십을 인정받았다는 점 ▲칠숙의 난 이후 김유신 집안과 함께 김춘추 집안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
▲의자왕·연개소문 정권의 등장 이후 선덕여왕의 권위가 급속히 약화되면서 김춘추-김유신 콤비가 외교·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했다는 점 ▲신라가 국운을 개척하기 위해 외교 방면에서 활로를 모색하던 때에 마침 김춘추가 외교의 귀재로 인정받았다는 점 ▲김춘추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아들들까지도 당나라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갖도록 함으로써 당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는 점 등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춘추가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진덕여왕 사후에 알천이 섭정을 포기하면서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춘추는 선덕여왕 시대는 물론이고 진덕여왕 시대에도 왕위계승권자로 부각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왕권을 꿈꾸고 있었을지 몰라도, 폐주 진지왕의 손자라는 낙인이 찍힌 김춘추는 함부로 왕의 꿈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교방면에서 실력을 쌓는 동시에 김유신 가문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한편 당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면서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며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르며 훗날에 대비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 바로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김춘추는 결코 자신의 재능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광(韜光)이란 표현이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양회(養晦)는 했다. 어둠 속(불리한 신분)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면서 성골여자들이 모두 사라질 날을 기다리며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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