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문노'가 미실의 남편 '세종' 라인이었다고?

윤탱여팬 2009. 7. 1. 12:59

'문노'가 미실의 남편 '세종' 라인이었다고?

시녀 소화가 덕만공주를 데리고 왕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연막작전을 펴기 위해, 아기를 안은 것처럼 베개를 안고 미실 측 무사들을 유인하는 문노.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문노(정호빈 분)는 일당백의 무사다. 그의 진가는 천명·덕만 쌍둥이가 태어난 날에 여실히 드러났다. 시녀 소화(서영희 분)가 덕만을 안고 왕궁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연막작전을 펴기 위해, 한 팔로 마치 아기를 안 듯 베개를 안은 문노는 다른 한 팔로 수십 명이 넘는 미실 측 무사들을 상대로 일대 격전을 벌이고도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궁궐을 빠져 나간 소화가 덕만을 안고 동굴로 숨어들었다가 칠숙 무리에게 붙들려 끌려 나왔을 때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마치 쾌걸 조로처럼 나타나 칠숙 무리를 홀로 무찌른 인물도 다름 아닌 문노였다. 문노가 아니었다면 덕만공주는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충직하게도, 문노는 그런 자신의 기량을 오로지 진평왕 부부를 위해서만 사용한다. 진지왕 폐위 당시 설원랑(설화랑)의 부하들에게 납치된 마야부인(진평왕의 부인)을 구출하기 위해 끝까지 뒤쫓아 간 사람도 문노였고, 화백회의에서 '엄마 같은' 미실이 진평왕의 부인으로 결정되기 직전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마야부인을 데리고 나타나 어린 진평왕을 궁지에서 건져낸 인물도 바로 문노였다.

우직하고 일당백인 문노, 실제 역사에선 어땠을까?

드라마 속 이미지 때문인지, 우직한 문노 하나만 있으면 악녀 미실이 그 무슨 기막힌 카드를 내놓는다 해도 드라마 속의 '좋은 놈'들은 미실에게 대적할 수 있을 듯하다. 검법이 뛰어난 문노 하나만 있으면 '나쁜 놈'들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간에 진평왕 쪽은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직함과 검법 하나만으로도 혼자서 절대적인 수적 열세와 전략의 열세를 모두 다 극복할 수 있으니, 드라마 속 문노는 정말로 '이상한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도 계속해서 문노만 애타게 찾고 있다. 그는 시청자들이나 진평왕 쪽 사람들에게는 '꼭 만나봐야 할 인물'이고 미실 쪽 사람들에게는 '꼭 죽여 버려야 할 인물'이다.

그런데 '출연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빅카드를 준비하는 것인지, 문노는 시청자들과 등장인물들의 궁금증만 증폭시킨 채 소식을 끊고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 드라마 상으로는 벌써 대략 20년 정도 행방불명 상태인 듯하다.  

실질적으로는 3회 정도밖에 출연하지 않았는데도 드라마 <선덕여왕>의 최고 스타 중 하나로 떠오른 문노. 진평왕 부부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고 있어서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언제라도 극중 상황이 일거에 뒤바뀔 것만 같은 기대감을 주는 문노. 그 문노가 실제로는 '엉뚱한 사람'의 라인에 속해 있었다면 어떨까? 실제의 문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유신과 동일한 콤플렉스 가졌던 문노

미실의 남편인 세종.
ⓒ MBC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47 '김흠운 열전'에 간략히 언급되어 있는 문노에 관해서는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가 매우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제8세 풍월주 문노 편이 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등극 직전인 538년에 태어나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년)의 재위기인 606년에 사망한 문노는 진평왕 집권 초기인 579~582년에 제8세 풍월주로서 활동한 바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원래 문노에게는 출세길 즉 풍월주의 길을 막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것은 소년 김유신의 콤플렉스와 유사한 것이었다. 부모 쪽에 하자가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 문노 편에는 그의 어머니에 관한 설이 소개되어 있다. 가야국 문화공주였다는 설, 야국왕(野國王)이 조공한 여자였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야국(野國)의 의미를 두고 한국고대사 연구자 이종욱은 왜국 즉 일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여러 가지 설에도 불구하고 문노 자신이 "나의 외가는 가야 출신"이라고 말한 점을 근거로 <화랑세기>에서는 문노의 어머니가 가야국 공주였을 가능성에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가 가야계라는 이유로 신분상의 콤플렉스를 가진 김유신과 마찬가지로, 문노는 어머니가 가야계라는 이유로 동일한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김유신과 비교할 때, 문노의 처지는 훨씬 더 안 좋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김유신의 경우에는 아버지 쪽에만 문제가 있었지만, 문노의 경우에는 부모 양쪽에 똑같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 출신인 어머니 쪽 말고 아버지 쪽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비조부는 제23대 법흥왕(재위 514~540년)의 총애를 받아 537년에 병부령(국방부장관)이 된 인물이었지만, "지소태후가 정권을 잡자 비조부를 내치고 등용하지 않았다"라고 <화랑세기>에 쓰인 것을 볼 때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막후실세로 떠오른 진흥왕(재위 540~576년) 집권 초기에 정계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비조부의 정계은퇴 시점은 문노의 출생시점(538년) 직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가야국 출신인 데다가 출생 직후 아버지마저 정계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어머니 쪽의 출신과 아버지 쪽의 배경이 모두 다 약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노에게는 부모 양쪽이 출세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를 외할머니로 둔 김유신과 비교할 때, 문노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불리한 편이었다.

출신이 한미한 그가 풍월주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진흥왕 재위기인 554년, 555년, 557년에 문노가 백제·고구려 등과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고도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위와 같이 그의 출신과 배경이 모두 한미했기 때문이다. 출신과 배경이 그러하다 보니 그의 전공을 적극 추천해줄 인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출신과 배경이 그처럼 한미한 인물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걸어서 하늘까지 가는 기적의 연출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제7세 풍월주 설원랑에 뒤이어 제8세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기본적으로는 문노의 자질이 매우 우수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문노는 검도를 잘하고 기개가 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검도를 잘했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개가 높았다는 것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이에 관해서는 김유신이 확실한 증언을 해주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김유신은 화랑 문노를 '기개의 으뜸'으로 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출중한 자질을 갖추고도 젊은 시절의 문노는 출세길에 쉽게 들어서지 못했다. 한미한 출신 및 배경에 더해 강직한 성품마저 거기에 한몫 한 듯하다. 성품이 강직해서 그나마 자신을 적극 홍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공로에 대해 신라 조정이 아무런 상을 내리지 않는데도 묵묵히 자기 일만 열심히 한 것을 보면, 그의 성품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파와 함께 진지왕 폐위 쿠데타에 참여한 문노

그런데 그런 문노의 능력에 주목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이끌어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미실의 남편 세종이었다. 진흥왕 재위기인 561~568년에 제6세 풍월주를 지낸 인물이다. 제7세 풍월주 설원랑의 전임자였다.

평소 문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세종은 풍월주가 된 후에 문노를 자기편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 그런데 다른 경우 같았으면 아랫사람을 시켜 "나랑 한 번 만나보자"는 전갈을 보냈겠지만,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직접 문노의 집으로 찾아갔다. 유능한 인재를 부하로 삼을 때에 필요한 예법을 갖춘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문노를 찾아간 세종은 이렇게 간청했다.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청하노니,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런 세종의 말이 하도 간절해서, 문노 역시 몸을 굽혀 세종의 수하로 들어갔다고 <화랑세기>는 전하고 있다. 이때에 형성된 두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는 평생토록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문노는 미실파와 함께 진지왕 폐위에 가담했다.
ⓒ MBC

문노와 손을 잡은 직후에 세종은 진흥왕에게 문노를 적극 추천했다. 하지만 문노는 진흥왕이 주는 벼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문노와 진흥왕이 꽤 밀접했던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두 인물이 별로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노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진지왕 폐위 시점(579년)이었다. 이때 문노는 미실과 세종의 지휘 하에 진지왕 폐위에 가담했고, 여기서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를 계기로 문노는 아찬 벼슬과 풍월주 등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문노의 풍월주 취임시점(579년)이 진지왕 폐위 시점과 일치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미실과 세종 등이 주도하는 진지왕 폐위 쿠데타에 참여한 것이 문노의 출세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출신과 배경이 한미해서 신라사회의 엘리트가 되기 힘들었던 문노에게 출세의 발판을 만들어준 인물은 미실의 남편인 세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노는 기본적으로 세종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종 편에 가담하는 것이 곧 미실 편에 가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문노가 미실에 대해서만큼은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문노를 미실의 사람이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자신에게 기회를 만들어준 세종에 대해 문노 역시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화랑세기> 제7세 풍월주 설원랑 편에서는 "미실에게 시종일관으로 대한 사람은 설원랑이었고, 세종에게 시종일관으로 대한 사람은 문노였다"고 평가했다. 설원랑이 미실에게 평생토록 충성을 다 바쳤듯이 문노 역시 미실의 남편 세종에게 죽을 때까지 충심을 다했다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문노가 세종 측과 대립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위와 같이 실제의 문노는 세종과 매우 견고한 유대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문노는 진흥왕이나 진평왕이 아닌 세종의 사람이었다. 그는 오로지 세종만을 주인으로 알고 그에게만 전적 충성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래서 "문노는 누구 라인이었느냐?"라고 묻는다면, "문노는 세종 라인이었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