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박융?

윤탱여팬 2010. 10. 20. 23:36

이 사람도 역시나 융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인물이다. 그의 약력은 아래와 같다.


박융(朴融) 미상∼1424년(세종 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 자는 유명, 호는 우당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 정준, 헌납(獻納) 정지아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 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그도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 뒤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이 있다.

출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9999_1_0004592


그는 고려 말 팔은(八隱)으로 불리며 조선 초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 분인 송은 박익의 아들이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그는 시문집인 우당집을 써 이름을 남긴다.

그럼 그의 대표적인 시를 하나 소개한다. 진주 촉석루에 적혀있는 제영시 이다.

 

 

 

(晋山形勝冠南區)진산형승관남구 (況復臨江有此樓)항부임강유차루 (列岫層巖成活畵)열수층암성활화 (茂林修竹傍淸流)무림수죽방청류

(靑嵐방불屛間起)청람방불병간기 (白鳥依稀鏡裏浮)백조의희경리부 (己識地靈生俊傑)기식지령생준걸  (盛朝相繼薛居州)성조상계설거주

 번역문


▶진산[晉山]은 좋은 경치 남녘에 으뜸이라 // 하물며 강가에다 이 다락 세웠으니 // 메뿌리 층층 바위그림으로 살아 있고 //
   짙은 숲 울울한 대밭 맑은 흐름 결하였다.// 푸른 이내는 병풍 사이 일어난 듯 // 백조는 거울 속에 떠오르듯 귀하여라 //
   지신[地神]이 인재 낸 줄 이미 알았건만 // 성조[盛朝]는 벽거주[벽居州]를 서로서로 이어왔네.//

출처 손곡박씨들의 카페

http://cafe.daum.net/songok114/JOl1/62


이 시는 그가 1425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로 있을 때 촉석루(矗石機) 제영(題詠) 원운(原韻)의 청을 받아 원후운(原後韻)이 백여 수나 되는데 그 중 하나이다. 이런 걸 보면 그도 대단한 문장가였던 것 같다. 역시 1408년 식년시 병과 2위의 실력. 근데 그 실력 나도 좀 가질 수 없나? 이 글의 마무리를 못하겠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