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얘기한 데로 융을 찾던 중 새로운 재미있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불리는 연산군의 이름이 이융이라는 것이다. 연산군이 이 이름이라는 게 처음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자료를 찾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래는 내가 찾아 본 연산군의 치적이다.
첫 번째 :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한 끝에 비융사 설치. 비융사는 1500년(연산군 6)에 설치된 것으로, 정 ·종5품의 별좌(別坐) 4명을 두었다. 영의정이 도제조를 겸임하고, 병조판서가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이것이 설치된 뒤 철갑옷이 널리 보급되었으나, 1504년에 폐지되었다.
출처 네이버 사전
두 번째 : 상평창(1498) 설치. 상평창은 이른바 흉년에는 백성들을 구하고, 풍년에는 농민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에서 시가(市價)보다 비싸게 미곡을 사 두었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싸게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정, 생활을 돕고자 한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곡가가 등귀할 때에 고가로 포(布)를 사들였다가 곡가가 저락(低落)할 때에 염가로 미곡으로 바꾸게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세 번째 : 호적 식년 개정(1498).
네 번째 : 종묘조천의 편찬(1495)
다섯 번째 : 종묘제도 제정(1495)
여섯 번째 : 세조 이래 편찬되지 않은 [국조보감]을 세조 이하 덕종(의경세자), 예종, 성종조의 내용을 첨부하여 다시 편집하여 찬진하게 함(1498)
일곱 번째 : 변경지방에로의 사민(徙民)의 독려
여덟 번째 :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음(1495)
아홉 번째 :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킴(1495)
열 번째 :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제 재실시(1496)
열한 번째 : 임신최요방 간행. 1503년(연산군 9)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하였다. 임신하였을 때에 조심할 음식물이나 섭생에 대하여 저술한 의서.
열두 번째 :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 인들을 회유시켜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함(1495)
열세 번째 : [경상우도지도]를 만듦
열네 번째 : [동국여지승람]을 수정. [구급이해방언해]를 간행. [동국명가집]을 간행함(1499)
열다섯 번째 : [역대명감]을 편찬함, [속국조보감]을 찬진함, [농서 언해], [잠서언해]를 간행함, 신미의 [목우자수심결언해]를 간행함(1500)
열여섯 번째 : 명으로부터 염직을 배움(1502)
열일곱 번째 : 김익경이 제조한 수차를 경기도, 충청도에 시험적으로 설치(1502)
열여덟 번째 : 함경도에 빈민문제 규율을 위해 사창을 설치함(1502)
출처 대왕세종 갤러리 http://gall.dcinside.com/list.php?bbs=&id=3jong&no=38060
이렇게 놓고 보면 연산군도 꽤 괜찮았던 사람 같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연산군의 치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고, 지금은 우리는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반정으로 임금이 된 사람이 쫓아낸 왕을 좋게 평가할까? 반대로 최대한 나쁘게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 역사를 정확히 믿을 수 있을까? 사관은 최대한 평정심을 가지고 중립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관 역시 사람인데 어떻게 사심이 안 들어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연산군은 폭군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연산군도 어렸을 때부터 세자수업을 통해 어떤 왕이 성군인지 알 것이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했을 것이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니 너무 안 좋게만 볼게 아닌 것 같다.
연산군이 폭군이 된 이유를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억울한 죽음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지만 연산군은 안질 때문에 많이 위축돼 있었다. 책을 두어 장만 읽으면 눈에 티끌이 덮는 것 같다고 하기도 했고, 안개가 앞을 가리고 있는듯하다 고백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경연에 참석하지 않아 학자들의 빈축을 샀는데 그 이유는 학문에 뜻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연에 참가하면 글을 읽고 써야 하는데 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참석을 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시각장애로 인한 열등감으로 국정을 보살피지 않아 중종반정으로 결국 축출이 되고 만다.
출처 에이블뉴스 http://www.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06&NewsCode=000620100125120500920750
위의 기사는 연산군이 폭정을 한 이유를 시각장애로 인한 열등감에서 찾고 있다. 물론 이 기사에 있는 내용이 정설은 아니다. 생모가 아닌 사람에게서 자라서 애정결핍이었다는 설도 있고 많은 설이 있다. 무엇이 정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연산군도 폭정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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